작년에 장수대에서 한계령으로 타면서 귀때기청봉을 거쳐 보고 이번에 같은 봉우리를 타는 게 두번째입니다. 그 때는 마치 와호장룡의 한 장면처럼 산행 내내 능선 양편이 완벽하게 안개로 가려지는 바람에 이 능선 산행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보다 귀때기청봉 주변의 너덜바위 지대가 주는 황량함이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교리에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한계령으로 이동하면서 기사분과 날씨를 얘기해 보니 이번에도 또 그럴까 하는 불안감이 스며듭니다. 적어도 날씨예보와 속초, 양양군, 인제군에 1주일째 비가 계속 부슬부슬 오고 있다는 기사분 얘기로 이건 기대를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결론은, 이런 날씨에서만 볼 수 있는 경치를 그것도 과해서 식상하지 않도록 볼 수 있었던 드문 산행이자 트렉이었습니다. 아래 이번 트렉의 기본 정보입니다.

 

트렉 코스: 한계령 ~ 귀때기청봉 ~ 1408봉 ~ 대승령 ~ 남교리탐방지원센터. 산행앱에 따라 19km ~ 20km

트렉 시간: 오전 5시 40분 ~ 오후 3시

교통편: 분당에서 자차로 새벽 3시 출발, 남교리탐방지원센터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계령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성수기에는 한계령휴게소(사유시설)가 주차장을 폐쇄)

날씨: 새벽부터 오전 내내 가벼운 비가 예보됨. 정상부 기온은 10~11도. 설악산 주변 지역 예보나 대청봉 주변 예보나 같음

 

그 동안 설악산 산행으로 한계령을 찾었던 때가 비수기였다는 것을 이번 트렉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막연히 단풍철이니 한계령 휴게소가 좀 붐빌거라고 예상해서 상황을 알아보려고 휴게소에 전화하고, 양양군청이나 인제군청에도 전화해 봤습니다. 전화하면서 알게 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한번 더 확인한 사실은 단풍철 같은 성수기엔 한계령휴게소 주차장이 폐쇄된다는 사실. 아니 정확히는 산행객들이 찾는 새벽시간에는 주차할 수 없다는 것을요. 한계령휴게소가 사유시설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고, 그러다보니 관광객들이 주로 오는 시간대에 주차공간이 없다는 건 사업하는 사람 입장에서 곤란한 일이죠. 이건 이해되는데, 그 이른 새벽에 경찰차가 나와서 사유시설에 주차 못한다는 안내지도를 귀에 따갑게 하는 건 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무튼 택시에서 내리면서 상황을 확인하는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트렉의 종착지에 차를 두고 왔으니 급할 것도 없고 이제 편하게 오늘 계획했던 트렉을 즐기면 되겠습니다. 다만, 날씨의 변화를 바랄뿐.

 

한계령삼거리로 가는 새벽 길

 

능선의 시작점인 한계령 삼거리까지는 땀이 좀 나는 경사가 급한 길인데, 한계령이 이미 1,000m에 가까운 고도이고 한계령삼거리가 1,350m 정도이니 고도로는 350m 정도를 오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할 만합니다. 다행히 출발하면서부터 예보와는 달리 비가 거의 오지 않습니다. 사실 예보는 설악산을 끼고 있는 속초, 양양, 인제 날씨이거나 설악산 정상부 날씨이지 그 사이 고도 예보는 아니니 기상청을 나무랄 이유는 없습니다.

 

어느덧 땀 좀 빼니 한계령삼거리에 다다릅니다. 오른쪽으로 가면 대청봉, 왼쪽으로 가면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오늘의 트렉코스입니다. 압도적으로 대청봉쪽으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동트기전 일출을 볼 수 있는 시간때엔 더욱 그럴 것 같습니다.

 

한계령 삼거리 이정표와 오늘의 트렉코스 고도정보(출처: https://gemseed.tistory.com/403)

 

 

귀때기청봉하면 정상 주변의 너른 너덜바위 지대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커다란 바위편들이 제멋대로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구조로 멀리서 보면 표면이 삐뚤빼뚤한 거대한 바위밭입니다. 

 

귀때기청봉 주변의 너덜바위밭과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내설악 봉우리들

서로 모양이 다른 바위편들이 서 있거나 누워 있는 각도가 다르고 바위편들 사이에 발이나 다리가 빠질 수 있는 빈 틈이 많아 너덜바위지대에서는 정말 조심하면서 오르고 내려가야 합니다. 특히 오늘 같이 땅이 젖어 있는 날에는. 내리막길에서는 자칫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젖은 바위가 참 위험하다는 것, 오늘 귀때기청봉을 넘어 너덜바위지대 하산길에서 제대로 경험했습니다.

 

너덜지대로 진입하면서 고개를 드니 오늘 희망이 보입니다. 이른 아침인데 예의 하늘 빛이 비치고 멀리 귀때기청봉 정상도 보입니다. 운 좋으면 멋진 경치를 맞이할 거라는 기대도 해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렇게 귀때기청봉 정상으로 오르는 너덜바위길에서 잠깐잠깐식 하늘이 열립니다. 운해가 깔리고 햋빛이 먹구름 사이를 뚫고 비치는 모습이 종교적인 엄숙함까지 느끼게 합니다. 날씨때문에 내설악쪽 능선이 전혀 보이질 않는데 이렇게 남설악쪽이 살짤살짝 열리면서 이런 날씨에서만 볼 수 있는 풍광을 선사합니다. 정상을 넘어 반대쪽에서는 오늘 본 풍광 중에서 최고를 맛 보게 됩니다.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너덜바위 길에서 아직 탐스럽게 달려 있는 마가목 열매와 분비나무를 만납니다. 분비나무는 구상나무처럼 생겼는데 좀 찾아보니 귀때기청봉 주위에서 발견되는 침엽수는 분비나무네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침엽수 구별법은 이 링크에서.  안타깝게도 이렇게 푸른 분비나무를 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연구자들에 따르면 온난화가 원인이라고 하는데 설악산 전체에서 분비나무 군락이 서서히 고사하고 있답니다.

 

귀때기청봉 정상을 지나 반대편 너덜바위지대로 내려오다가 만난 풍광들입니다. 사진속에 보이는 봉우리는 1408봉. 바람 많기로 유명한 귀때기청봉 정상 아니었으면 아마도 못 봤을 경치입니다. 사진에서도 보듯 수시로 운무가 바람에 실려 오고 가면서 그때마다 순간순간 이런 경치를 보여 주곤 했습니다.  안 그래도 허기를 느끼던 때라 잠시 쉬어가면서 오늘 트렉중에 제일 오랫동안 머물던 곳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그야말로 경치에 취해 있었습니다. 

 

 꼭 유화로 풍경화를 그리는 것 같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 사진을 찍기 전 주변이 온통 거친 바위인 곳에서 앉을 만한 곳을 찾다가 젖은 바위에 미끄러지면서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 했습니다. 경험상 젖은 바위나 나무 위를 걸어갈 때가 산행중에 제일 위험한 때인 것 같습니다. 겨울철엔 체인이나 아이젠이 받쳐주는데 다른 계절엔 그러지도 못하고.

 

귀때기청봉을 지나 1408봉으로 향하면서 들어온 경치입니다. 왼쪽에 남설악은 가끔 이렇게 시야에 들어오는데 오른쪽 내설악쪽은 여전히 안개로 가득합니다. 다음에 이 코스를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생겼네요. ㅎㅎ

 

 

이 높이(1,300 ~ 1,500m)에서는 벌써 단풍이 자취만 있습니다. 아래 단풍 모습이 그나마 유일하게 온전했던 것으로 사진에 남깁니다. 단풍잎이 떨어진 모습도 땅이 젖어버려 그 고운 색깔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으나 등산로를 벗어나 발이 닿기 어려운 곳에 너무도 고운 빛깔로 빛이 바랜 나뭇잎이 달려 있어 찍었습니다. 마치 봄에 막 자란 새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1408봉을 넘어서면 대승령까지 완만한 내리막길이자 설악산의 여느 능선길과 달리 높은 곳에 위치한 편안한 산길입니다. 이는 말보다 사진이 더 분명하게 전달할 것 같습니다.

 

점심 때가 돼 드디어 하산길의 시작인 대승령에 도착합니다. 대승령 이정표 보다는 조선시대 조인영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다녀가고 남긴 시에 더 눈길이 갑니다. 싯구절중 '좋은 경치 눈앞에 막 펼쳐지니 험준한 곳임을 어찌 헤아리랴'에 공감 팍! 오늘 내설악쪽 경치까지 열렸으면 대박 공감이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살짝.

 

대승령을 지나면 하산이 시작되는데 처음 약 2~30분 동안은 얌전하게 생긴 안산이라는 봉우리를 타고 넘어가는 오르막(고도 약 150m, 길이 약 1km)을 올라야 합니다. 1408봉을 지나 쭉 내리막 하산을 하였으니 당연히 계속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기대했는데, 한마디로 '읔'입니다. 조금 과장을 하면 오늘 트렉의 최초 오르막길인 한계령~한계령삼거리 만큼 땀이 납니다.

 

안산만 넘으가면 그 뒤로는 쭉 내리막길입니다. 안산이 고도가 1,250m쯤 되고 남교리탐방지원센터가 약 300m이니 고도차는 1km이지만 길이는 무려 8km가 넘어 정말 길고 완만하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하산하게 됩니다. 바닥도 표면이 고른 돌길로 만들어 놓아 젖은 날씨만 아니면 뛰어 내려가도 될 정도입니다. 사진속 길이 약간 습한 날씨 속의 한라산 느낌도 줍니다. 

 

 

이 하산길도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인데 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아래 영상에서도 보이듯 아래쪽 큰 계곡물로 모아지기 전의 시냇물과 한 동안 같이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작은 물길이라 거의 바로 옆에 두고 걷는 느낌이라 조용한 산길을 물소리와 함께 걷는 기분입니다.

 

 

하산이 가까워질수록 물은 점점 커지고, 깊어지고, 세차집니다. 

 

단풍이 7~800m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빨간 단풍, 노란 단풍, 누런 단풍... 빨간 단풍잎의 단풍나무 말고도 자작나무, 거제수나무, 아까시나무, 생강나무 등도 단풍잎을 만들어 냅니다. 빛깔이 다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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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교리 하산길은 몇 주전 걸었던 천불동 계곡과는 사뭇 다른 계곡길입니다. 천불동 계곡은 규모도 거대하고 걷다가 위를 둘러보면 설악산의 암봉들이 솟아있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그에 비해 남교리 하산길의 계곡은 솟구친 암봉들의 모습은 없어도 길따라 작은 물이 큰 물로 모아지는 모습도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걷는 길의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줘 큰 계곡임에도 작은 산의 계곡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긴~ 하산을 마치고 다시 설악산공원 조감도를 마주합니다. 방하트렉으로 갔다오는 설악산도 오늘까지 벌써 세번째입니다. 그 동안 개인적으로 그리고 동료들과 여러차례 즐겨 찾았지만 지도를 보니 이 너른 곳, 아직도 찾을 곳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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