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부터 산행을 좋아했으니 참 오래하고 있는 활동입니다. 제목에도 쓴 것처럼 꽤 오래전에 설악산 공룡능선을 탄 적이 있는데, 그 땐 저의 산행은 일종의 운동. 좋은 공기 마셔가며 어떻게 하면 빨리 정상에 올라 꼭대기가 주는 시원한 조망을 잠시 눈팅하다가 목적 달성했으니 거의 뛰다시피 하산. 이런 식이다 보니 산으로 가득한 우리나라에서 한 번 간 산 혹은 코스는 웬만하면 다시 안 가고 하는 식이었죠. 그래서 오래 전 일이기도 하고, 경치를 감상하거나 숲과 나무를 눈여겨 보거나 하지 않아 등산은 했는데 머리 속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 당시는 스마트폰도 없고 산행중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도 않아서 기억을 도와 줄 사진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젊었을 때 했던 많은 산행중의 하나인 공룡능선. 사실 올해엔 늦여름이나 늦어도 초가을엔 꼭 다시 한 번 찾자는 생각으로 날씨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막바지에 때 늦은 비가 한달 가까이 속초 주변에 머물고 있어서 가을에 가겠거니 하던 차에 마침 방하 도전트렉에서 가을 코스중 하나로 올라올 줄이야. 덕분에 갖다 왔습니다. 공룡능선을 타는 코스는 너무도 유명해 많은 블로거들과 유튜버들이 소개하고 있어서 코스를 안내하는 게 무의미해 보여 산행중 찍은 사진과 비디오를 중심으로 후기를 구성합니다.

 

트렉일자: 2021년 9월 19일(토)

트렉코스: 설악산 소공원 주차장 ~ 비선대 ~ 금강굴 방향 ~ 마등령 삼거리 ~ 공룡능선 ~ 희운각대피소 ~ 천불동 계곡 ~ 소공원 주차장

트렉시간: 오전 5시30분 ~ 오후 5시(9시간 30분)

날씨: 예보는 속초시나 설악산 정상 모두 새벽에 간간히 비, 늦은 오후까지 흐리고, 그 뒤로는 구름낀 맑은 날씨. 기온은 속초시는 새벽엔 16~17도 낮엔 23~24도. 설악산 정상은 대략 그보다 10도 정도 낮음. 예보는 예보고 실제는 산행 초기 가벼운 긴팔에 우비를 덧입어야 할 정도로 다소 쌀쌀하고 비가 출발하는 시각부터 주룩주룩. 그러나 공룡능선 일부 구간에선 가벼운 긴팔이나 반팔이 적당했넌 날씨

교통: 소공원까지 분당에서 자차로. 네비로 2시간 20분 거리 

 

비선대로 향하는 길에서 어둠이 걷힌다

 

올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당연히 기대도 높고, 날씨도 그만하면 괜찮고, 추석 명절 첫날이긴 하나 이른 새벽에 떠난지라 길도 막힘이 없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는데 속초에 가까울수록 간간히 굵은 빗줄기도 만나고 하면서 다소 불안감이 스멀스멀. 주차장에 도착해 보니 비는 이제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내리기 시작합니다. 몇 대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소공원 주차장은 이미 차 버려 주차요원들이 이중, 삼중 주차지도 하면서 차키를 두고 내리라 소리 치고. 살짝 심난해 집니다. 비선대로 향하는 길에서 막 어둠이 걷힐 때 찍은 위 사진의 분위기처럼 날씨만 보면 오늘 과연 산이 주는 대한민국 자연경치중 최고라고 하는 공룡능선을 볼 수 있을까? 비선대로 향하는 3km 진입로를 걷는 내내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얼마 전에 새로 산 신발은 '비를 이기는 신발은 없다'를 확인해 주듯 걷기 시작 30분이 넘으면서 양말까지 적십니다. 더 심난해 집니다.

 

다행히 비선대에 도착하면서 비는 좀 우선해지고 금강굴로 향하는 깔딱고개를 타면서 비는 그칩니다. 예보대로 오후부터는 정말 날씨가 좋아져라 바라면서도 이 많은 안개가 햇빛에 물러갈 수 있을까 불안해 합니다. 내심 빛 좋은 날씨와 안개속의 신비한 설악산을 같이 볼려나 하는 기대도 애써 하게 됩니다.

 

* 참고로, 아래의 사진들은 일종의 사진모듬들로 사진 좌우에 손가락을 살짝 대면(핸드폰에서) 화살표가 보이고 그 화살표를 눌러 다른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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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튼 비선대에서. 비가 막 그친 후(사진 좌우에 손가락을 살짝 대서 사진을 넘겨 보세요)

적어도 금강굴로 올라갈 수 있는 갈림길까지는 그런 기대가 허망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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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새벽, 금강굴 갈림길에서. 원경은 안개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마등령 삼거리로 향하는 깔딱이가 계속되는 동안 날씨는 비가 그친 것 말고는 달라짐이 없고, 안개는 높이를 더해 갈수록 짙어지기만 합니다(아래 사진들 참조). 힘든 깔딱이 등산을 잊게 해 줄 설악산의 새벽 비경도 낮은 높이에서만 잠깐 보았고, 마등령 삼거리에서 보는 공룡능선의 멋진 선은 볼 수가 없습니다. 간간히 마주치는 등산객들의 기대는 커녕 실망이 가득한 목소리도 더해지고. 어쩔 수가 없지요. 그냥 계속 가는 수밖에. 원경이 안 보이니 가까운 곳에 눈길이 가고, 빨간 열매를 맺은 마가목과 정말 이른 단풍이 눈에 들어 옵니다(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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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등령 삼거리향 깔딱이 ~ 공룡능선 초입까지 짙은 안개와 함께

 

그런데 이런 다소 실망스러운 날씨는 오늘 공룡능선을 바라보고 온 사람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듯 반전을 가져오네요. 1275봉을 앞두고 드디어 짙은 안개가 물러 가고 갑자기 해와 구름이 능선의 주변 풍경을 '짠!'히고 보여줍니다. 앞서가던, 뒤에 있던 등산객들의 탄성이 여기저기 이어집니다. 경치 자체의 멋진 모습과 함께 찍는 사람의 감정이 담겨야 더 멋진 사진이 나온다고 합니다. 아마도 오늘 찍은 사진 중에서 그런 순간이 담긴 사진일 것 같습니다. 혹여 다시 안개로 시야가 닫힐까봐 연신 사진을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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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5봉을 앞두고 반전된 날씨

 

영상으로도 담아 봅니다.

 

 

 

그저 감탄을 자아내는 이런 풍경들은 신선대까지 이어집니다. 화강암인 설악산 암봉과 암릉, 비온 후 얼마되지 않아 마치 마스카라로 그려 넣은 듯한 명징한 선들과 대조가 분명한 색감들로 인해 안그래도 아름다운 공룡능선의 모양과 선들을 더욱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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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5봉을 지나서 신선대로 가는 길에

 

이번 트렉에서 새로 발견한 즐거움입니다. 마가목에 정말 선명하고도 탐스럽게 열매가 맺혀 있는 모습들입니다. 자주 보이는데 쉽게 손이 닿지 않는 낭떠러지 바로 아래 있거나 해서 만지기는 어렵습니다. 찾아보니 배수가 잘 되는 사질양토와 습기를 머금은 토양에서 잘 자란다고 하네요. 마가목을 좀 더 알고 싶으시면 여기에. 가을 단풍과 더불어 설악산을 요맘때 생각나게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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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공룡능선의 한쪽 끝인 신선대에 당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쉬워하며 뒤를 돌아다 봅니다. 금강산과 함께 설악산도 북쪽으로 가게 휴전선이 그어졌다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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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대에서 바라 본 공룡능선

 

여기서부터는 희운각 대피소까지 급격한 경사의 하산 길입니다. 경치에 취해 몸과 마음이 느슨해 질 수 있지만 다시 긴장하면서 내려가야 합니다. 곳곳에 손발을 다 쓰고 철봉 지지대를 단단히 잡아야만 내려갈 수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희운각까지 내려오면 처음 약 500m정도 제외하고 4km의 구간이 고도 1천미터에서 약 300m까지 경사가 완만한 길입니다. 이 코스의 또 다른 아름다움인 천불동 계곡과 함께 하면서. 여기까지 오면 몸은 많이 피곤합니다. 게다가 평탄한 길이니 어서 모두 마치고 쉬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기타 사정이 허락하면 중간중간 쉬면서 물소리와 함께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는 설악산의 선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내려가시라고 하고 싶네요. 안 그러면 생각보다 길고 힘들게 느껴지는 구간이 될 수 있습니다.

 

천불동 계곡의 시원한 물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

 

저의 이번 트렉에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방하의 원밀(1 Meal) 두 개와 동네 빵집의 바께뜨가 점심과 간식이 돼 주었습니다. 보통은 원밀 하나로 충분한데 코스가 긴만큼 한 개 더 준비했습니다. 산행하면서 여럿이 이것저것 싸와 나눠 먹는 즐거움은 단독산행할 때는 좀 기대하기 어렵죠. 이럴 때 간편한 행동식이면서 영양도 고려한 무언가를 찾게 되는데 원밀은 저한테 그런 식품이고, 덕분에 배낭 속 먹을 것에 대한 고민과 무게에 대한 부담이 사라졌습니다. 원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면 여기 링크에 몇 가지 체험기가 올라와 있습니다.

 

계곡 바위위에 원밀(1 Meal)

천불동 계곡을 내려오면서 눈에 들어오는 모습들을 담았습니다. 여전히 좋은 날씨 속에 오후 2~4시 사이에 편안한 마음으로 찍은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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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동 계곡을 따라 비선대로

 혹자는 비선대를 지나 소공원 주차장까지의 하산 구간이 공룡능선에서 제일 힘들다고 푸념을 합니다. 비선대까지 이미 약 17km의 산행으로 몸이 많이 지쳐있는 데다가 설악산 하면 떠오르는 풍광도 더 이상 볼 수 없고, 길도 대부분 시멘트나 아스팔트 길이어서 그럴 만도 합니다. 다. 그런데 새벽 동트기전에 출발을 해서 볼 수 없었던 계곡의 하류, 길을 따라 양 옆으로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물푸레나무 참나무, 멀찍이 보이는 설악산에 눈을 두면서 걷으니 좀 덜 힘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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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0년만에 다시 찾은 설악산 공룡능선 코스. 등산 하신갈의 긴 진입로, 숨이 턱에 차게 만드는 비선대~마등령 삼거리 구간, 천불동 계곡 등 구간마다 나름의 이유대로 힘들지만 공룡능선 구간 만큼은 다시 해 보니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능선 자체의 지형으로 험로가 군데군데 있지만 수시로 나타나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걷는 내내 동력이 됐던 것 같습니다. 이 맛으로 앞으로 더 찾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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