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길 정진의 길(제주도)
일시: 2022.4.30(토) 07:16~17:09
트렉코스: 영실주차장~존자암지~하원수로길~언물입구~법정사지~시오름갈림길~돈내코탐방로~남국선원~선덕사
트렉거리: 25.6km
영실주차장행 버스는 제주시에서 출발해 서귀포로 오기 때문에 첫 차가 오전 8시 반이라는데 늦은감이 있다.
택시는 주말 이른 아침에는 운행을 안한다고 펜션 사모님이 일러 주었다.
다행히 펜션 사장님 차로 6시27분 숙소를 출발해서 7시 10분경 영실주차장에 도착했다.
영실휴게소로 가는 길목으로 매표소를 통과해야 하고 작은 주차장과 화장실이 있고 존자암지 입구가 보인다.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어 겉옷을 하나 더 겹쳐입고 트렉을 시작한다.
주차장에서 존자암지까지는 1km정도인데 가는 길이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살림살이의 여유가 느껴진다.
존자암지는 제주불교의 발원지로 추정하는데 한라산의 서북 방향의 볼레 오름 남쪽 기슭 해발 1,200m 고지에 있다고 적혀 있다. 정진의 길 시작점으로 의미가 있는 듯 하다.
존자암세존사리탑에 절하고 바라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존자암지를 오르는 길에 노루를 만났는데 존자암지 경내에서도 노루와 마주쳤다. 멀리 가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익숙해 보인다.
존자암지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와 다시 영실 방향으로 0.9km정도 가다 보면 좌측에 하원 수로길 입구가 있다.
'정말 이 높은 곳에 수로가 있구나!'
하원 수로길은 1950년대 후반에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논이 한 마지기도 없던 하원 마을 주민들이 논을 만들고 영실물과 언물을 하원저수지로 보내기 위해 수로를 조성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피땀이 녹아내린 이 길을 나는 지금 지혜의 갈증을 느끼며 걷는다.
이 비슷한 모습으로 4km를 걸으며 다소 지루하다 여겨질 때는 이 수로를 만든 분들을 떠올린다.
하원 수로길이 끝나고 만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과 의열사.
예상하지 못한 역사현장을 마주하니 ......그러고보니 많은 아픔이 있는 제주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법정사지는 터만 있고 현존하지는 않는다. 대신 민간인이 그 자리에 개인집을 지어 살고 있다.
법정사지에서 한라산 둘레길에 속하는 동백길에 들어섰다. 꽃피는 시기가 지난 탓에 동백꽃은 보기 어려운 것 같다.
누군가 길 따라 줄로 비슷비슷한 샛길로 헤매지 않게 해 놓았다.
일정 구간 지날 때마다 반복되는 계곡과 자주 눈에 띄는 특이한 모습의 식물들.
이제는 우거진 숲이 되어 나무로 덮어버린 숯가마터로 옛 삶의 현장을 지난다.
누군가 떨어진 꽃으로 ....
시오름가는 구간에 4.3유적지가 있어 깜짝 놀랐다.
꽤 넓은터에 돌담이 쌓여있다.
제주민의 아픔이 다시 느껴진다.
숲이 우거져 내내 햇빛이 들지 않아 음습한 구간들이 많았는데 갑자기 하늘이 보인다. 너무 반갑다.
편백숲을 지나 돈내코쪽으로 가다 보면 표고버섯 재배장 팻말들이 있다. 이곳에서 개들을 키우는지 갑자기 개짓는 소리가 요란해 마음이 불편해진다. 어느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개가 눈 앞으로 뛰쳐 나올 것 같다.
끝날 줄 모르는 돌길과 반복되는 계곡 건너가기가 지루할 때 쯤 나타난 늦게핀 동백꽃....
여기는 비가 올 경우 길까지 넘쳐 흐르는 정도로 심해 보인다. 길이 물에 쓸려 온 낙엽더미들과 질펀한 곳이 많고 계곡입구마다 비 올 경우 건너지 마라는 위험경고 표시가 있다.
돈내코 탐방 입구 드디어 눈앞이 열린다.
하늘과 구름, 도시와 자연이 어우러진 시원하고 멋진 풍광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약간은 무겁고 음침했던 기운이 싹 날아가버린다.
돈내코탐방지구안내소 앞에서 좌측으로 남국선원을 향해 간다.
마침 지나가시는 스님을 따라 가며 남국선원과 선덕사 위치를 여쭈니 선덕사길은 개통되지 않아 본인도 가다가 되돌아 온 적만 있어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일단 스님따라 남국선원에 들어가보고, 앗 하루에 한 끼만 드시며 공부하시는 스님들이 계시니 주의하라는 문구가 눈에 띄는 바람에 조심스럽다.
여기서 초파일 등을 켜고 싶은데 법당과 종무소는 인적이 없고 조용하기만 하다. 매달려 있는 등도 보이지 않는다.
좀 전 스님은 선덕사길이 염려스러우신지 가다가 길을 잃으면 되돌아와야 한다며 사라지셨다.
정진의 길에서 유일하게 미개통 구간인 마지막코스 선덕사를 가려고 남국선원 뒷길로 나와 쭉 걸어가다 채종원을 지나서 빨간 리본이 매달려 있는 숲길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지나온 안전한 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기다리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쓰러진 나무, 길없는 길 조금가다 정말 길을 잃었다.
빨간 리본은 보이지 않고 방향을 알 수 없다. 긴장이 바짝 된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서 살펴보니 저기 희미하게 빨간색이 보인다. 내리막인데 경사는 거의 70~80도는 되는지 거칠고 미끌어질 것 같아 아슬아슬하다. 그래도 빨간 리본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한다.
오늘 하루 중 정신이 바짝 나는 순간이다. 스릴과 긴장을 짧은 시간 안에 다 맛보았다.
종착지 선덕사에 왔다.
규모가 무척이나 크고 화려하게 꾸며진 모습들이 낯설다.
정진의 길 마지막 코스인 절인데 .....
내려와서 일주문을 보니 인도가 아닌 절로 가는 다른 길이 있는 것 같다.
거꾸로 내려오지 않고 일주문부터 차근차근 보면서 올라갔으면 안내문처럼 아름다운 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제주 트렉은 비가 오지 않아 나름 상쾌했다.
아픈 역사를 되새기니 우거진 숲을 지날 때 조금 음침한 기운이 느껴졌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그렇게 슬픈 역사가 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래도 제주도는 제주도다!
육지의 아름다움과는 또다른 멋을 트렉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의 축복을 받은 듯한 제주에서 지혜의 끝자락이라도 붙잡길 원했지만 싱그러운 자연만 눈에 담아 온 듯 하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다음에는 다른 길을 갈 것이지만 마음은 하나임을 조금씩 알아간다.
함께 한 도반님께 감사드린다.